이 우주가 인간에게 아예 관심이 없다면

_‘괴물 기후’ 시대를 염려하는 어느 작가의 도감

김치형 세 번째 개인전 <버려진 놀이공원> 해설

김신식 (감정사회학자, 시각문화연구자)

입이 달린 자연

‘괴물 폭염’ ‘괴물 산불’ ‘괴물 홍수’…. 환경 관련 전문가와 저널리스트는 우리가 ‘괴물 기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진단한다. 기후 위기가 그만큼 심각하단 뜻이다. 뒤돌아보면 “화마火魔”라는 말처럼, 예로부터 사람들은 괴생명체를 비유로 들어, 기후와 관련된 재난의 위력을 표현해 왔다. ‘화마가 마을을 집어삼켰다’라는 관용적인 문장에서 보듯 화재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무서운 이유는, 자연이 입을 벌려 무엇이든 입 안에 넣는 괴물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계속 그리는 차원》 이후 4년 만에 세 번째 개인전을 여는 김치형은, 그동안 기후 위기를 둘러싼 문제를 주의 깊게 지켜보며 공부해 왔다. 괴이한 생명체가 출현하는 ‘크리처물’ 같은 김치형의 회화 세계에선 ‘입을 벌린 괴물’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번 전시에서 괴물의 입 벌림은 기후 위기에 드리운 공포와 만난다. 섬뜩하게 입을 벌린 채 쓰러져 있는 괴기스러운 생명체(<버려진 놀이공원 2>), 입을 벌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물에 잠긴 도시를 공격하는 히드라(<hydra after>) 등이 그 예다. 어쩌면 그는, 입을 벌려 무시무시한 이빨과 끈적한 침을 흘리는 괴물을 기후 위기가 낳은 부작용이자, 위험에 처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기후 그 자체로 나타내고 싶었는지도.

이에 관하여 김치형의 기지가 느껴지는 작품은 전시명이기도 한 <버려진 놀이공원>이다. 해당 그림을 가까이에서 살펴보자. 작가는 물에 잠긴 놀이공원을 표현하면서, 인간이 그림을 대하는 시선상 하늘이 있을 법한 자리에 거대한 얼음조각을 위치시켰다. 이는 인간의 발과 지면이 물에 잠긴 수준 너머, 인간을 압도하는 높이까지 차오른 수위水位를 보여줌으로써, 해수면 상승과 기후 위기의 관계를 강조하는 효과를 낳는다. 더 나아가 회화를 에워싼 네모난 틀과 선을 인식하면서 해당 작품을 접하면, 한 편의 그림이 불가사의한 존재의 거대한 입처럼 다가와, 그 존재가 놀이공원을 비롯한 도시 속 공간을 입 안에 넣은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업보’ 때문이라는 인간의 착각

계속해서 김치형의 ‘크리처 회화’에서 두드러진 괴물의 입 벌림에 주목하자면, 전작 <old sandwich> 나 <초밥왕국> 등에선, 인간이 입을 벌려 먹는 음식이 괴물이 되었다는 풍자 짙은 상상력을 볼 수 있다. 맛을 음미하고자 양손으로 샌드위치를 잡고 오므리는 인간은, 괴물이 된 샌드위치의 먹잇감이 된다(<old sandwich>). 괴물이 된 초밥은 입을 벌릴 준비가 된 인간의 젓가락질에 훼손되거나, 인간이 입맛을 높이고자 찍어먹는 와사비를 무지막지하게 핥아먹고 토해낸다(<초밥왕국>). 이처럼 두 작품에선 인간이 음식을 입 안에 넣어 확인하는 식감이나 풍미의 흔적을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이쯤 하여, 작가의 상상력에 힘입어 나 또한 거듭 상상해보고 싶다. 괴물이 입을 벌려 어느 대상을 먹을 때, 괴물에겐 맛이 중요할까. 괴물은 자신의 입 벌림을 통해 무슨 상징성을 드러내고 싶은 걸까. 인간의 입과 괴물의 입을 한번 비교해보자. 가령 누군가의 외압으로 입이 막힌 인간은, 인간다움의 가치를 외치는 해방을 생각하며 입을 벌릴 수 있는 상태를 요구한다. 한편으론 침묵시위처럼, 인간은 스스로 입을 막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 한다.

반면 우리가 영화 등을 통해 접해온 괴물은 대체로 입을 벌려 자신의 위용을 과시한다. 하지만 인간처럼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개성 넘치는 의지의 발현이나 세심한 감정을 표출하고자 입을 벌리진 않는다. 괴물이 인간 세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서사가 물론 공개되어 왔지만, 그 경우 괴물은 인간의 마음과 감정이 투영된 문화적 캐릭터에 가깝다. 더욱 과감해지자면 괴물이 입을 벌렸을 때 무시무시하다 생각하는 것 또한, 우리가 일찍부터 인간의 의도가 들어간 대중문화 속 괴물을 통해 학습한 결과인지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각 문화에서의 괴물성을 연구한 알렉사 라이트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요약한즉슨 이렇다. ‘인간은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괴물을 창조함으로써, 괴물의 입장보단 인간 사회에 도덕적 교훈을 심어주고 인간 자신이 낯선 존재에게 느끼는 극심한 위협감과 공포감을 누그러뜨리고자 했다’.

여기서 김치형의 작업이 흥미롭게 다가오는 측면은, 그의 그림에선 부조리를 일삼는 인간의 구체화된 형체와 괴물의 대비를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의 모습이 있을 법한 자리엔 인간 대신 괴생명체, 괴생명체가 휩쓴 뒤의 잔해, 극에 몰린 인간이 세운 듯한 인공물이 존재한다. 그 또한 오류를 일삼는 인간을 향한 경고일 수 있지만, 부조리한 인간 vs 그 인간을 생생하게 해치우는 괴물의 구도를 명확하게 내세우지 않은 김치형의 크리처 회화는, 다음과 같은 사고를 도모할 기회를 제공한다. ‘인간은 괴생명체의 등장을 인간을 향한 경고의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인간이란 종에게 그리 관심이 없다.’ 이번 전시를 통해 관객은, 괴물의 습격이나 역습이 인간을 향한 경고장으로 작용함 너머, 괴생명체를 위시한 자연과 이 우주의 세계가 인간에게 경고를 보내고 싶을 만큼, 그다지 인간에게 관심 없다는 생각의 영역에 진입해볼 필요도 있으리라.

사실 방금 언급한 바는, 코로나19가 찾아오고 팬데믹 시대가 초래한 기후·생태의 위기가 논의의 수면 위로 올랐을 때 소환된 공상과학 소설가 H·P 러브크래프트의 사유다. 공포소설 작가 토머스 리고티의 설명처럼, 19세기에 태어난 러브크래프트는 문학 작가들이 무시무시하고 기이한 존재를 창조해낸 다음, 인간을 깨우치기 위한 건전한 동기로 활용하는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후 ‘우주의 무관심주의’로 명명된 그의 사유는, 혼란과 파괴로 대변된 초자연적 현상을 경험하면서 부각되는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했다. 쉽게 말해 인간은 기이한 존재가 일삼는 파괴와 그 혼란의 흔적에서 인간 본위의 가치를 회복하라는 신호를 읽어내지만, 정녕 이 우주와 자연은 인간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팬데믹 시대를 겪기 시작한 여러 분야의 창작자 및 비평가, 생태·환경 전문가 그리고 인간 중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길 경계해온 신유물론자들은 우주의 무관심주의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제안했다. 이 자연과 우주의 세계는 인간의 삶과 그 생리가 돌아가는 바와 상관 없이 자체적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고로 우리는 김치형의 그림 앞에서 기후 위기의 사례인 해수면 상승의 심각성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그의 작품을 통해 배달할 때 오는 플라스틱 용기 소비를 좀 줄여야겠다는 다짐이나 기후 문제에 대한 교양서적을 읽어봐야겠다는 의욕을 품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김치형의 작업과 작품을 통해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기후를 맞닥뜨리며, ‘이게 다 인간의 업보 때문’이라고 고백하는 인간의 입 벌림이 착각하는 점은 무엇인지도 곱씹길 제안해본다.

색채라는 픽션

“놀랍게도 뭔가 희미하게 움직이더니 무형의 거대한 공포가 하늘로 솟구쳤던 곳으로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다. 색채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땅이나 하늘의 색채가 아니라….”

_H·P 러브크래프트, 「우주에서 온 색채」中

러브크래프트에 관한 이야길 이어가자면, 대표작 중 한 편인「우주에서 온 색채」는 인간 세상에 침입한 미지의 무언가를 색채로 설정한 소설이다. 우리는 가시광선의 도움을 받아 육안으로 색깔을 구별하고, 눈앞에 있는 대상에게 맞는 색이 있다고 인식하거나, 색상을 마주하는 동안 인간으로 손색없이 살아감을 자각한다. 특히 색깔마다 인간의 갖가지 감정을 개입시킴으로써, 인간은 자신이 해석하는 기준에서 별 이탈 없는 색깔의 자리를 고수하려 애쓴다. 그러나 괴물 기후의 시대, 녹색으로 변해가고 있는 바다에 대한 보도를 접하며 우리는 늘 안도감을 준다고 여겨온 녹색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녹색이 공포와 위험의 신호로 의미 부여되어온 빨강과 노랑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긍정적이면서 행복을 준다고 여겨온 색깔도 위협적일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와 연관하여 평소에 도감과 그림을 보길 즐겼던 러브크래프트는「우주에서 온 색채」를 통해 인간이 규정해놓은 색의 인식을 뒤흔들며, 인간이 식별할 수 없는 색채를 괴이한 타자로 설정했다. 이를 감안할 때, 미국과 인도를 다니며 형형색색의 동식물을 직접 보고, 도감 보기를 즐겼던 김치형의 작업에선 색감을 구사하는 데 동원되었을 작가의 성의가 짐작되는 지점이 그림 곳곳에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우리가 김치형의 회화 세계에서 새어 나오는 으스스한 매력을 체험해보기 위해선, 그가 충실하게 표현하는 색감에서 실감이 난다고 감상 포인트를 잡기보단, 작품에서 드러나는 색상들을 픽션으로 대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으스스함이란, 특정한 존재가 있으리라 여겨온 곳에 막상 그 존재가 없을 때 생성된다는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의 관점을 감안하자면 김치형의 크리처 회화에서 색이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색과 색이 칠해진 공간·장소의 관계를 뒤흔들어보는 계기가 된다. 색이 자아내는 으스스함은 그림으로 확인되는 색 자체가 아니라, 색 너머의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색 설정을 예상 가능한 현실에 대한 오류 여부에 가두지 않은 채, 우리가 살아갈 미래를 상상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리라. 물에 잠겨 폐허가 된 놀이공원의 벽 색깔은 저러할 수도 있다 생각되지만 한편 ‘나’의 예측대로 정말 저럴 것이라고만 자부할 수 있을까. 기후 위기에 내몰린 인간의 가상 휴양지와 산호로 이뤄진 건축물, 조각난 빙하의 색은 저러하리라 예견되면서도, 줄곧 그러리라 안심하며 지낼 수 있을까(<얼음휴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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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질문을 챙기며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현안을 놓지 않되, 이에 관계하는 미술의 가능성을 건전한 교훈에 예속시키지 않으려는 작가의 일상 탐험을 헤아려본다. 그 탐험에서 마주한 순간순간에 감응하며, 익숙하지 않은 상상의 타자를 그려 관객에게 건네려는 작가의 몸짓을 상상해본다. 인간의 의식 범위에서 벗어나 있는 우주에서 온 색채를 상상한 채, 인간다움에 안주하지 않고자 손에 쥔 마카를 연습장에 대며, 그만의 미래 도감을 제작하는 작가의 손짓에서 용기를 얻어본다.

작가노트

김치형 두 번째 개인전 <계속 그리는 차원> 작가노트

나는 계속 그림을 그린다. 내가 속한 차원은 계속 그리는 차원이다. 여기서 차원이란 3차원, 4차원을 말할 때의 공간체계만이 아닌, 보다 더 광범위한 우주를 의미한다. 나라는 생명체는 계속 그림을 그림으로써 우주를 생성하고 또한 그 우주에 포함된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지만 우주는 서서히 팽창하고 있다. 우주의 시작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아득한 기억 속엔 하나의 장면이 남아있다.

어릴 적 놀러갔던 사촌의 집이다. 거대한 숲을 등지고 있는 집이고, 그 숲 쪽으로 난 방에 나는 앉아 있었다. 방에 아주 커다란 창문이 뚫려 있어서 무심히 시선을 던졌는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반딧불이 수백 마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넓이도, 깊이도 짐작할 수 없이 캄캄한 숲의 어딘가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반딧불이가 날아들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모여든 반딧불이 무리는 은하수와도 같은 흐름을 만들며 하늘을 향해 상승했다. 신비롭고 몽환적이었다. 다큐멘터리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그곳은 메릴랜드였다. 어렸을 때 잠시 그곳에 살았다. 메릴랜드 주의 내가 살던 마을에는, 기억에 따르면, 바다처럼 거대한 늪이 있었다. 그리고 늪의 수면 위로는, 말 그대로 팔뚝만한 개구리가 펄쩍 펄쩍 뛰어오르곤 했다. 메릴랜드의 자연은 모든 것이 거대하고 신비로우며 야생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루레이 동굴은 기상천외한 몬스터들이 숨어 있는 미지의 소굴 같았고, 반딧불이 무리를 목격했던 숲은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거미괴물과 같은 괴생명체를 맞닥뜨리게 될 것처럼 으스스했다.

미국뿐 아니라 인도에 거주하면서 직접 보았던 무수한 곤충과 동식물, 책과 영상에서 본 화석이나 신화 속 동물들은 내 그림 속에 변형되어 등장한다. 나는 서로 다른 종들을 합성시키기도 하고, 여러 종의 부위들을 합성하여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기도 한다. 「해바라기와 바위산 꽃밭」 속 거대 해바라기는, 해바라기와 거대 눈알, 햄스터 이빨, 문어의 촉수로 이루어진 생명체이고, ‘천국에도 흉악한 식물이 있다면?’ 이라는 질문으로 탄생된 「천국의 황제꽃」은 오징어의 촉수와 용의 날개, 꽃이 합성되었다. 역관절 다리를 가지고 있는 「방사능 곰」은 등과 어깨에 부착된 생물학적 굴뚝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끝없이 초록색 체액을 흘린다.

때로는 무생물을 합성하거나 무생물을 생물화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인간들에 의해 사육당하는 샌드위치와 초밥을 들 수 있다. 「Old sandwich」 속 다리와 이빨이 달린 샌드위치들은 역으로 인간들을 먹기 위해 벽을 부숴 샌드위치 가게를 탈출하고 있고, 「초밥왕국」 속 와사비와 간장을 먹고 사육당한 초밥들은 3층 건물만큼 거대해져, 젓가락 기계가 초밥을 놓쳐버리자 「초밥지옥의 몰락」에서와 같이 도시를 파괴하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동안 무수한 생명체를 탄생, 재탄생시켰지만 한 번도 합성이나 변형의 소재로 그리지 않은 생명체가 있다. 그것은 사마귀이다. 나는 지금까지 사마귀와 동등한 매력을 가진 생명체를 발견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무엇과도 합성할 수가 없었다. 사마귀의 가장 커다란 매력은 앞다리이다. 그것은 강력한 낫 같아서 어떤 상대도 꼼짝 못하게 할 수가 있다. 풀숲에 숨어 있다가 쥐나 도마뱀 같이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도 앞다리로 휘감아 게걸스럽게 씹어 먹는 것이다. 이렇게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거친 야생의 에너지는 내게 자유로 다가온다.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방랑자. 내게 사마귀란 그런 존재이고 나 역시 어떤 규칙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나의 우주를 계속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본 텍스트는 창작그룹 밝은방이 김치형 작가와의 인터뷰 후 작성하였습니다.